서강대민주동우회
국가무형유산 배연신굿 대동굿 전승교육사 조성연 동문 탐방 본문

_조성연 동문님은 서강대에 입학하고 탈반으로 활동하셨는데요, 이후의 활동에 대해 소개해주십시오.
저는 1979년 서강대 수학과에 입학해 동아리 탈반에 들어갔습니다. 동아리에서는 주로 춤과 소리를 배웠는데 너무 재미있어서 열심히 했더니 선배들이 잘한다고 칭찬해주고 저도 ‘아~ 내가 제법 잘하는구나’ 느꼈지요. 그래서 소리나 악기를 더 배워야겠다 싶던 차에 ‘민요연구회’를 만났습니다. 그곳에서 활동하면서 자연스레 민중문화운동의 길로 들어섰죠. 가리봉동에서 노동운동을 하다가 안양으로 넘어가서 문화노동운동을 했습니다. 그때는 나이 제한으로 28살까지만 취직이 가능해서 형님 소개로 기아자동차에 영업사원으로 취직해서 3년 일하다가 내 길이 아니라는 생각에 1992년 익영영화사에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같이 문화운동을 하던 여균동 감독의 <세상 밖으로> 제작부장을 거쳐 <테러리스트>, <패자부활전> 등의 프로듀서로 20년 일했습니다.
_조성연 동문께서는 문화운동을 하셨는데 어떻게 김금화 만신을 만나고 김금화 만신의 신아들이 되고 악공인 상장구(장구잽이)로 활동하게 되었습니까? 그 과정이나 계기를 듣고 싶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민요연구회’에 김금화 만신의 신딸 김경란 선배가 있었습니다. 선배 덕분에 김금화(1931~2019) 선생을 만나게 되었지요. 김금화 만신은 신내림을 받은 강신무로 1985년에 ‘서해안배연신굿과 대동굿’으로 중요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가 되었습니다. 선생은 철물이굿, 만수대탁굿, 배연신굿, 지노귀굿 등 모든 굿에 뛰어났습니다. 그분의 상장구가 되는 건 쉽지 않았습니다. 당시 상장구는 거의가 여자였고 배타적인 분위기가 강해서 남자인 제게는 가르쳐주지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독학하다시피 노력한 끝에 드디어 김금화 만신의 인정을 받고 굿판에서 장구채를 잡게 되었지요.
제가 김금화 선생을 ‘신어머니’라고 부르지만 저는 신내림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선생의 굿을 함께 다니고, 제가 중국어와 영어가 가능해서 선생이 외국에 갈 때 동행해 통역도 하고 크고 작은 일을 도와드리다 보니 사람들은 제가 내림굿을 받은 줄 압니다.
_작업실을 둘러보니 절이나 점집의 배경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그림이 있는데요, 동문님의 요즘 근황을 듣고 싶습니다.
제 명함에 “국가무형유산 서해안 배연신굿 및 대동굿 전승교육사이자 무신도 화공, 신꽃 및 종이 작업가”라고 적었듯이 저는 국가무형유산 서해안 배연신굿 및 대동굿을 제자들에게 교육하기도 하고 무당의 신당을 꾸미는 그림을 그리고 종이꽃을 만들기도 합니다.
제가 무속화를 그리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김금화 만신의 상장구로 활동하던 어느 날, 선생이 만수대탁굿을 끝내고 그림을 몇 장 꺼내셨는데 벽해 류수명(1895~1938) 선생의 무속화였습니다. 처음 본 그림들이었는데 마음에 깊이 와닿더라고요. 그래서 무속화를 그려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림을 그리자면, 먼저 본을 잡아야 했는데 본을 잡는 데만 꼬박 2년이 걸렸습니다. 완성된 그림을 보고서 역으로 그림의 윤곽선을 추측해 밑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죠.
_그림을 보고 그림의 첫 단계를 유추해 밑그림을 그리셨다면, 그림에 굉장한 소질을 가지신 듯합니다. 이곳에서 본 무속화는 색이 원색이라서 그런지 화려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무속화에서는 어떤 종이나 물감을 쓰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그림에 소질이 좀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미술선생님이 그림을 그리라고 권하기도 하셨죠. 그래선지 상장구를 하면서도 그림에 관심이 있었고 마지를 그리면서 아주 좋았습니다. 마지(麻紙)라는 건 마로 만든 종이인데 무속화는 다 마지를 씁니다. 마지에 그림을 그릴 땐 분채(粉彩)라는 물감을 씁니다. 색이 선명한 분채는 무속화나 민화에 제격이죠. 분채는 그림을 그린 후 시간이 흐르면 안료가 종이에서 떨어집니다. 그래서 접착력을 높이려고 아교에 개서 그림을 그립니다. 그러자니 과정도 복잡하고 불편했죠. 그래서 요즘은 간편하게 무기질 안료를 씁니다.
_이제 굿이나 무속에 대해 여쭤볼 텐데요, 우리 전통신앙인 무속과 일반 종교와 차이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무속에는 수천의 신령(靈魂)과 만이 넘는 성수(人神)들이 있습니다. 천지신명이라 해서 하늘과 땅의 신이 있는데, 천하궁에는 3×3,000, 지하궁에는 28수의 신이 있고 임경업 장군이나 이순신 장군처럼 인간도 사후에 신으로 모시죠. 북한지역 특히 황해도에서는 이처럼 수많은 신을 모시는 큰 무당을 만신(萬神)이라 부릅니다. 그래서 김금화 선생이 만신으로 불린 겁니다.
일반적인 종교에서는 신과 인간은 엄격히 구별되고 인간은 신이 될 수 없습니다. 또 하나 무속과 종교의 큰 차이점은 무속의 사제인 샤먼은 신을 받아들이는(접신) 반면, 일반적인 종교의 사제는 신과 인간을 매개하는 메신저의 역할을 한다는 점입니다. 기독교 같은 종교는 사회성이 강하고 고도로 조직화되었지만 무속은 신과 개인의 만남을 중시하고 개별화된다는 게 차이라면 차이겠습니다.
_지난 의기제 ‘마구재비’ 공연 때 김의기열사 한풀이 굿 노래를 들어보니 죽은 자 영혼의 한을 풀어주기보다 산 자(유족 포함한 모든 산 자들의)의 한을 풀어주는 의미가 더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특히 요즘처럼 산 자들의 한(스트레스, 트라우마, 우울증 등)이 많이 쌓이는 세상에서 한풀이 굿이 긍정적인 면을 말씀해주신다면?
마구재비 공연 때 하는 소리는 한풀이 굿으로 동해안 오구굿의 일부분입니다. 굿은 죽은 자의 넋을 극락왕생하도록 비는 역할도 있지만 산 자를 위로하고 정화하는 의미가 큽니다. 굿의 기능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힘들 때 의지하고 기대서 일이 잘 풀리고 편안해지면 “덕 봤다”고 표현하듯 산 자를 위한 연희의 성격이 강합니다. 굿을 보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받을 수 있습니다. 뭐라 표현하기 힘든 복받치는 듯한 느낌과 울림을 받기도 합니다.
저도 힘들 때면 제가 태어난 곳에서 가까운 본산에 가서 빌고 오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그게 뭐 대단한 게 아니라 굿이든 뭐든 정성으로 빌다 보면 들어오는 느낌이 있어요. 그런 경험 덕분인지 설명 불가능하지만 저는 신령님이 계시다는 걸 느낍니다
_서강에서 운동하다 일찍 세상을 떠난 민주열사들이 적지 않은데 그 열사들을 위한 한풀이나 인생이 안 풀리는 동문들을 위해 굿을 해보는 것 어떨까요?
좋지요. 열사들도 그렇지만 보이지 않게 고생한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특히 강제징집 당해 녹화사업이라는 말도 되지 않는 미명으로 어두운 보안사에서 홀로 고립되어 모진 고초를 받은 분들이 의외로 많아요. 얼마나 큰 트라우마에 마음고생을 했겠습니까? 그 외 운동하느라 제 때 졸업도 못하고 젊은 시절을 보낸 채, 기회를 놓쳐 지금도 고생하는 동문들은 또 얼마나 많고요, 그분들의 한을 한때라도 풀어드려 마음이나마 편하게 한다면 의미가 있을 겁니다. 그게 계기가 되어 누구나 자기만의 한풀이 방법을 찾으면 더 좋겠습니다. 제가 힘들 때 제 본산에 찾아가 빌고 오는 것처럼 말이죠. 다만 굿을 한다면 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니 무당과 악사를 섭외하고 재물 등 준비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해보는 것도 좋겠지요.
여기 회장님도 계시니 차차 상의해보았으면 합니다. 더 궁금한 점은 다음을 기약하기로 하고 여기서 인터뷰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바쁜 가운데 시간 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글:김정은(서민동 사무국장)

